종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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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

종의 기원

정유정

악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

자기계발서는 열심히 살고자 하는 내게 좋은 지침이 되어주지만, 가끔은 뻔한 이야기로 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구경하러 소설책을 꺼내든다.

『종의 기원』 은 대학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재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책이다. 어느 날 친구네 자취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한 번 읽어볼게!" 하고 가져왔는데, 그대로 엄청난 장기대여가 되어버렸다.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최근 심리적 소모가 커서 자기계발을 잠시 손에서 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읽게 되었다. (상범아 미안하다!! 곧 돌려줄게ㅋㅋㅋ)

열심히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들로부터 잠시 도망쳤는데, 하필 도착한 곳이 인간의 악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웃긴 것 같다.

기억을 찾아서

소설의 배경은 과거 회상과 상상을 제외하면 넓은 집과 어두운 도로변, 단 두 곳이 전부다. 주인공 유진이 기억을 잃은 채 집 안에서 싸늘하게 죽어 있는 어머니를 마주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유진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스스로의 본성을 자각하고, 지나온 인생의 의미를 송두리째 뒤집어버릴 사실들과 마주하게 된다.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주인공과 함께 기억을 더듬어줘야 재밌는 책이니까..!

악은 만들어지는걸까

유진의 악의 스위치는 태생부터 존재했을까, 아니면 주변 인물들의 두려움이 그 악을 자극한 걸까.

소설을 읽는 내내 유진의 인생이 기구하게 느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일을 찾았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 그것을 반대한다. (그것이 반대하는 이유가 있을지라도) 상황에 나를 대입하니, 머리가 조일 듯이 답답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질문 하나가 따라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에 대해 반감을 가질 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택을 할까, 나를 위한 선택을 할까.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자식손주들을 위해 힘들게 담배를 끊었던 아버지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고맙습니다!)

지금껏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것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며 헌신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나는 혼자서 행복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 결핍을 알아버린 지금의 내가 유진의 인생을 산다면, 아마 나를 위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내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하필 살인이라면? 아마 끝나지 않는 사회적 고통 속에서 나를 숨기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유진이 수영을 그만두게 된 것이, 끝내 변호사가 되지 못한 것이 그토록 안타까웠다. 상위 1%의 사이코패스 프레데터로 태어났더라도, 사회에 녹아들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악과 욕망을 흘려보낼 출구 하나쯤은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

사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본문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고,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 것은 뒤에 있는 몇 장짜리 작가의 말이었다.

작가가 인용하는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주장은 이런 요지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선만으로도, 악만으로도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은 공진화했다. 그 과정에서 살인은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즉 진화적 성공의 도구였다. 그 무자비한 생존 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다.

그러니까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고, 악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오래전, 멀쩡하게 생긴 스물세 살 청년이 부모의 질책에 격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수십 차례 찔러 죽이고, 잠든 조카가 있는 집에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한 사건을 접했다고 한다. 청년은 사건 이후 태연하게 부모의 금고를 옮기고 마당을 청소했으며, 장례식장에서는 여자친구와 웃으며 놀았고, 체포된 후에는 거짓 진술로 일관하며 범행을 부모의 탓으로 돌렸다.

당시의 작가는 이 순수한 '악인'의 '악행'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내면이나 진짜 동기를 추측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다만 프로이트에게서 미약한 실마리 하나를 얻었다고 한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_그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_에 달려 있다.”

그렇게 작가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악인을 떠올리며 '유진'을 자기 안에 착상시켰다. 하지만 '외부자'의 눈으로 악인을 그려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객체가 아니라 주체여야 했다. 결국 작가는 자기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스스로 들여다봐야 했고, 그렇게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변해갔다.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런데 그가 바로 나인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이 어두운 숲을 굳이 보여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본성 안에 어두운 숲이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내 안의 악과 욕구에도, 타인의 악에도,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권선징악에 열광하는 이유

여기서부터는 책을 덮고 이어진 내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크게는 살인, 강간, 절도부터 작게는 거짓말까지. 법의 처벌을 받는 것도 있고, 단순히 사회적 인식이 구린 것도 있다. 이 목록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데이비드 버스의 말대로라면, 옆 사람을 죽이면 내가 먹을 과일이 늘어나니까 죽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의 짝과 자식의 상실감이 다시 살인자를 죽이고, 살인이 살인을 부르는 원초적 야만이 반복되자, 그것을 막기 위해 법과 사회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야만인들은 다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긴 시간을 살아왔다.

즉, 우리 피에는 아직 야만이 쓰여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이름으로 오만한 생각을 한 적이 있고, 욕망에 휩싸인 적도 많다. 다만 프로이트의 말처럼,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권선징악이 말하는 '악'의 반대편, '선'은 도대체 무엇일까. 되도록 많이 취해서 자식에게 물려줘야 번식에 성공하는 야만의 진화 관점에서 보면, 선은 참 쓸모없기 그지없는 속성이다. 물론 선한 영향력으로 좋은 관계를 쌓으면 악으로 얻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선의 시스템조차 무너진다. 법도, 사회도, 시스템도, 결국 핵폭탄 한 방이면 사라지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선을 이토록 중요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어렵기에 존경스러운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사회가 유지되려면 모두가 악을 숨기고 선을 내보여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권선징악에 대한 우리의 열광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나도 이 사회 속에서 힘들게 야만의 악을 참고 사는데, 감히 너는 그걸 참지 못하고 개인의 욕망을 위해 악을 행했다고? 그렇다면 사회 시스템을 어기고 남을 불행하게 만든 대가로 내가 참는만큼 '선'의 벌을 받아라.

어쩌면 우리는, 내가 악을 참아낸 만큼의 프리미엄을 붙여서 악인을 처벌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권선징악의 실체가 아닐까.

얻은 점이 있다면

자기계발서가 뻔하게 느껴져서, 나와 전혀 상관없어야 하는 살인마의 세계로 도망쳤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소설 역시 결국 나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작가의 어두운 숲인 유진을 구경하러 갔다가, 내 안의 숲 입구까지 안내받고 돌아왔다. 역시 책을 읽는 건 사유하기 위해서가 맞는 것 같다. 다 읽고, 아- 재밌었다! 하고 끝나는 책은 사실 제일 재미없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 안의 욕망과 악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 악을 응시하는 일은 악해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악에 대처하는 일에 가깝다. 내 안에 어두운 숲이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숲 앞에서도 무방비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소설이 던진 질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과 나의 살아있음이 부딪힐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유진과 달리 극단의 자리에 서 있지 않은 나는, 다행히 살인이 아닌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누군가의 행복을 경유하지 않고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들을 조금씩 찾아보려 한다. 아마도 그것이, 내 어두운 숲을 가장 안전하게 산책하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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