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능 우울증
고기능 우울증
인문

고기능 우울증

주디스 조셉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고장 나 버린 사람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

사실 최근에 유튜브에서 ‘청년층의 우울증의 패턴이 달라졌다’, ‘갓생 사는 사람들이 우울한 이유’ 같은 주제의 영상들을 자주 마주치면서, 나는 처음으로 ‘고기능 우울증’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계발도 열심히 하고, 일도 성실하게 해내며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인생의 기쁨을 잘 느끼지 못한 채 공허함과 무기력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설명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어쩌면 이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행복은 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진심으로 붙들고 씨름하는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관성대로 하루를 빈 틈 없이 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스스로를 꽤 잘 관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안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작은 우울감과 불안이 늘 잔잔하게 깔려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서울시 야외 도서관에서 이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심리 상담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 들어와. 왜 이제 왔어.
어~ 들어와. 왜 이제 왔어.

고기능 우울증

이 책에서 저자는 고기능 우울증을 겉으로는 일상적인 기능을 문제없이 수행하지만, 내면에서는 지속적인 우울감, 공허감, 의욕 저하를 겪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 정의를 읽는 순간, 내 일상을 들킨 것 같은 묘한 찜찜함과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런 패턴 자체가 하나의 현상이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상태구나’라는 자각과 함께, ‘그럼 해결 방법도 있지 않겠나’ 싶어서였다.

성실함과 책임감, 완벽함을 추구하는 태도가 그동안은 내 장점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이 책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나 자신을 소모시키는 방식으로 비틀어질 수 있는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무뎌지다.

책 1부에서 다루는 트라우마, 무쾌감증, 마조히즘이라는 세 가지 축은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특히 무쾌감증과 관련된 부분에서, 예전 같으면 기쁨을 느꼈을 만한 성취나 순간들이 점점 건조하게 느껴지고, ‘그래, 했으니 됐지’, ‘오늘도 무사히 해서 다행이다’ 정도의 감정만 남는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바쁘게 살고, 뭔가를 더 이루고,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제로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고 지나쳐 온 것 같다. 책에서는 기쁨을 느끼는 능력이 서서히 둔해지는 상태가 그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위험 신호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마조히즘에 대한 이야기 역시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계속 몰아붙이는 패턴, 관계와 일에 대한 책임감 뒤에 숨은 자기희생의 습관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헌신적인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포장해 왔던 것이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항상 맡은 역할 이상을 해내려고 애쓰는 태도가 사실은 ‘이 정도는 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불편했던 부분은, 책에서는 가족이나 연인 등 다른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고 하는데, 슬프게도 나는 내가 그냥 나를 스스로 계속 몰아붙였던 것 같다는 점이었다. 나는 항상 주변인들에게 말했다. "몸은 늘 편히 쉬려고 해. 그래서 그런 답답한 몸을 향해 머리가 딱 한 번 있는 힘껏 크게 소리쳐서 깨우는 거야." 그렇게 이성의 추진력으로 운동을 가고, 개발을 하고, 내 삶을 살아왔다.

근데 좀 쉬어도 되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깨웠어야 했을까? 내가 나를 몰아붙였던 이유는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 몸의 이야기를 조금 듣기 시작했다.

인정과 가치

책 2부에서 제시하는 5V 원칙(인정, 환기, 가치, 활력, 비전)은 인문 심리 자기계발 책에서 익숙하게 보던 팁들이었지만, 여전히 중요하고, 일상을 영위하다 보면 다시 까먹게 되는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나를 멈춰 세운 건 '인정'과 '가치' 두 가지였다.

지금까지 나는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했다. 정말 싫어하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그 뒤에는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아”라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덮어버렸다. 감정만 있는 그 자리에 남아있기가 너무 무섭고 버겁고 짜증이 났다. 헤드기어 안 쓰고 글러브 없이 묶어두고 감정이란 녀석이 나를 패는 느낌이었다.

감정을 피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
감정을 피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

이 책은 그걸 또 정곡으로 꼬집었다. “괜찮다”는 말이 진짜 괜찮아서가 아니라, 감정을 마주하는 일이 두렵고 귀찮기 때문에 꺼내드는 방패일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지금 느끼는 공허함, 불안, 피로감 자체를 우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메시지는 너무 많이 들어온 말이었다. 그 감정에 머물러 봐도 괜찮다고, 충분히 느껴도 된다고. 그런데 솔직히, 슬픔에게 있는 그대로 무방비하게 쳐맞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회복의 출발점인지 싶다. 일단 맞아보면 아는 방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 첫 시작이 너무너무 두렵다.

'가치'에 대한 장도 내 삶의 구조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해야 하는 일'을 우선순위 맨 위에 올려두고, 그냥 나로서 일상에 머무르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이 모두 마무리된 이후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문제는 '해야 하는 일'은 절대로 '멈추는 일'에게 시간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더 멈추기 위해 멈추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해치워가고 있었다. 성과와 유능함을 지나치게 중요한 가치로 올려두고, 여유, 즐거움, 관계에서의 편안함 같은 것들은 쉽게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건, 나는 여유와 즐거움, 관계의 편안함 또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성과와 유능함을 챙긴 뒤에 챙겨야 하는 것들 정도로 줄세워 두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문장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나는 잘하고 있지만, 잘 살고 있지는 않다'는 저자의 고백이 기억난다. 나 역시 할 일은 어떻게든 해내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신뢰받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 "지금 잘 살고 있냐"고 물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대답이 무엇일지 대충 감이 잡혔기 때문에, 고기능 우울증이라는 단어에 그렇게 꽂혔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질문을 회피하지 말고, 차분히 마주해 보라고 권했다.

멈추고 축하하자. 웃자 :)

'일상의 작은 승리를 기념하는 30가지 방법'이라는 챕터가 이 책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줬다. 처음엔 '너가 눈치채지 못했지만 잘한 것 리스트'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문장이 '평소보다 30분 일찍 잠자리에 든다'이길래 역시나 싶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제목이 '기념하는' 30가지 방법이더라. '잘한 것을 알아차리는' 게 아니라 '기념하는' 거였다. 말 없이 웃으며 읽어봤다.

수고했어 내 자신아.
수고했어 내 자신아.

거울 같은 책

이 책은 고기능 우울증을 가진 작가가, 최초로 고기능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이를 인정함과 동시에 회복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다. 처방약처럼 한 번에 완전히 치유하는 것을 약속하기보다는, 우리가 스스로를 잘 돌아보며 다시 우울감이 스며들 조짐을 느낄 때 그 흐름을 눈치채고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읽고 나서도 내 삶이 확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 속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신호들을 조금 더 민감하게 감지해 볼 수 있겠다, 돌아볼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다.

『고기능 우울증』은 내 삶의 모습과 감정의 패턴을 하나의 언어로 정리해 주었고,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마음의 신호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여전히 나는 바쁘게 살고, 여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겠지만, 이제는 내 몸이 보내는 신호 한 번 정도는 듣고 가려 한다. 그 속도가 정말 나에게 맞는 것인지,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나는 왜 그 목표들이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지 스스로에게 더 자주 물어보려 한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는 괜찮은가, 정말 잘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관성대로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거울 같은 책이었다.

+ P.S. 비생산적인 시간에 대하여

최근에 다수라는 작가의 만화를 즐겨본다. 이 작가의 여자친구는 정말 나와 비슷하다. 모든 시간을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인터넷 강의를 듣고, 무언가를 가꾸고, 만든다. 잠시라도 숨을 고르는 법 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런 여자친구에게 작가는 이렇게 말해준다.

너의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대견하면서 조금은 슬퍼진다.

내가 아는 너는 고양이를 안고 빗소리를 음악 삼아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을 좋아하고,

잔디밭에 누워 바람의 촉감과 햇살의 온도를 느끼는 일을 즐긴다.

목적지 없이 차를 몰아 제주의 풍경 사이를 흘러 다니는 일을 좋아하며,

모두가 잠든 시각 차가워진 공기 사이를 걷는 일을 기다린다.

이때만큼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미래를 그리는 너는 없다.

그저, 현재에 오롯이 존재한다.

이때의 너는 가장 너답다.

무엇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고, 무엇을 남기려 하지도 않는다.

빗소리를 듣는 일도, 바람을 맞는 일도, 밤공기 사이를 걷는 일도,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증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시간들이 너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을.

생산적인 시간이 너를 앞으로 밀고 간다면,

그 비생산적인 시간들은 너를 자신에게도 데려다 놓는다.

그러니 나는 가끔 조용히 바라기도 한다.

네가 잠을 길게 잔 어느 아침,

시간을 잃었다고 자신을 탓하는 대신, 창밖의 빛을 한참 바라봐주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사실은 가장 자신을 돌본 시간이었음을.

언젠가는 알아주기를.

오늘따라 잠을 길게 잔 너에게
오늘따라 잠을 길게 잔 너에게

출처: https://www.instagram.com/p/DYehsjjEg3L/?img_index=1&igsh=cGVhZDdqbnMxeXk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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